잊혀져가고 있는 전쟁 실패한 작전이라고 하지만 분명 장사상륙작전의 희생으로 인천상륙작전은 완성되었습니다.
우리가 잊고 있었던 772명의 학도병 이야기
작전명령 제174호 '장사상륙작전'과 '문산호' 침몰에 관한 종합 보고서
I. 서론: 작전명령 제174호, 기억 속으로의 항해
본 보고서는 한국전쟁의 전세를 뒤집은 역사적 전환점,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뒤에 가려진 '잊힌 영웅들'의 이야기, 즉 장사상륙작전(長沙上陸作戰)에 대한 심층 분석을 목적으로 합니다. 1950년 9월, 절박한 전황 속에서 작전명령 제174호에 따라 수행된 이 작전은 소년 학도병들의 숭고한 희생을 바탕으로 성공을 이끌었으나, 그 가혹한 기록은 오랜 시간 동안 역사 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본 보고서는 장사상륙작전의 배경과 전략적 의의, 그리고 당시 비운의 수송함이었던 LST 문산호의 침몰 과정을 재조명하고, 전후 이루어진 기념사업과 국가 예산 집행 과정에서 불거진 일련의 논란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과거의 비극적인 사건이 현대 사회에 남기는 교훈과 의미를 되새기고, 향후 유사 사업 추진에 대한 정책적 제언을 도출하고자 합니다. 보고서는 다음의 네 가지 주요 논점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 작전의 시대적 배경과 전략적 가치 분석, 둘째, 문산호의 운명과 작전의 비극성 규명, 셋째, 잊힌 영웅들을 기리는 과정에서 발생한 행정적·재정적 논란의 전말 파악, 마지막으로,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역사적 교훈과 미래를 위한 과제 제시입니다.
II. 작전명령 제174호: 시대적 배경과 전략적 가치
2.1. 풍전등화의 위기: 낙동강 전선과 인천상륙작전 계획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한 이래, 불과 두 달여 만에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리며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최후의 방어선에서 악전고투를 거듭하던 중,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적의 허를 찌르는 파격적인 전략, 일명 '크로마이트 작전'이라 불리는 인천상륙작전을 입안하였습니다.1 이 작전의 핵심은 서울과 인민군 전방 보급로를 동시에 차단하여 전세를 일거에 뒤집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작전의 성공을 위해서는 기습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치밀한 기만 전술과 보안 유지가 필수적이었습니다. 3
2.2. '성동격서(聲東擊西)'의 전술: 장사상륙작전의 실체
장사상륙작전은 바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한 고도의 기만 작전, 즉 양동작전으로 계획되었습니다. 3 육군참모총장 정일권 소장이 친필로 작성한 '작전명령 제174호'에 따르면, 작전의 공식적인 주목적은 인천상륙작전에 맞춰 낙동강 전선 돌파를 지원하기 위해 북한군의 보급로(7번 국도)를 차단하여 후방을 교란하는 것이었습니다. 4 부수적으로는 북한군이 유엔군의 대규모 상륙작전이 동해안에서 진행되는 것으로 오인하게 만들어, 인천 방어 병력을 분산시키는 효과를 노렸습니다. 3
인천상륙작전은 치밀한 기밀 유지와 기습 공격으로 인해 상륙 과정에서 인명 손실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3 이러한 성공에는 북한군의 주의를 효과적으로 분산시킨 기만 작전이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분석됩니다. 그 기만 작전의 핵심이 바로 장사상륙작전이었습니다. 3 장사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와 막대한 희생은 북한군에게 인천이 아닌 동해안에 연합군의 주력이 상륙하고 있다는 착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장사상륙작전에서 발생한 막대한 희생은 인천의 성공을 위한 전략적 대가(代價)였으며, 이는 위대한 군사적 승리 뒤에 가려진 비극적인 이면을 보여줍니다.
2.3. 독립 제1유격대대의 편성 과정
장사상륙작전에 투입된 병력은 육군본부 직할 독립 제1유격대대로, 병력의 90% 이상이 14세에서 17세에 불과한 어린 학생들이었습니다. 3 이들은 대구와 밀양 지역에서 모집된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입대한 지 18일 만에 작전에 투입될 정도로 훈련 기간은 2주 남짓에 불과했습니다. 7 대대장 이명흠 대위의 이름을 따 '명부대'로 불렸던 이들은,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위장 전술의 일환으로 미군 병력이 문산호에 오르내리는 기만 작전을 목격하고도 자신들이 수행할 임무의 실체를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7 이들에게 지급된 것은 소련제 모신나강 소총 한 자루와 북한군 군복이었는데, 이는 북한군으로 위장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
III. 비운의 수송함, LST 문산호의 기록
3.1. 문산호의 출항과 비극의 여정
장사상륙작전에 사용된 LST(Tank Landing Ship) 문산호는 원래 1943년 미국에서 건조되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상륙함(LST-120)으로, 한국전쟁 발발 후 교통부 산하 대한해운공사 소속으로 운영되다가 해군에 동원되었습니다. 4 1950년 9월 14일, 문산호는 이명흠 대위를 비롯한 독립 제1유격대대 병력 772명(학도병 및 지원 요원)을 태우고 부산항을 출발했습니다. 8
다음 날 새벽, 문산호는 태풍'카시아'가 몰고 온 거센 풍랑 속에서 경북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해안에 접근하다가 육지로부터 150m 떨어진 수중 모래톱에 좌초되었습니다. 4 해안 지형에 어두운 상태에서 거대한 파도에 휩쓸린 문산호는 더 이상 전진하지도, 후퇴하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7
3.2. 좌초 후의 치열한 전투와 희생
좌초된 문산호가 적에게 노출되자, 해안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던 인민군에게서 포탄과 총알이 빗발치듯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4 아비규환 속에서 이명흠 대위는 상륙을 명령하였고, 학도병들은 밧줄에 의지한 채 성난 파도와 총탄을 뚫고 해안으로 나아갔습니다. 4 이들은 당초3일 치만 지급되었던 식량(건빵 한 봉지, 미숫가루 세 봉지)과 탄약만으로 무려 8일간 혈전을 벌이며 적 보급로를 틀어막는 전과를 세웠습니다. 1
그러나 그 대가는 참혹했습니다. 작전은 끝내 철수로 마무리되었고, 이 과정에서 공식 전사자는 139명, 부상자는 92명에 달했습니다. 4 이 외에도 행방불명되거나 바다에 수장된 희생자가 많았으며, 이들의 정확한 수는 아직까지도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1 작전 임무를 마친 후, 문산호는 좌초된 상태로 버려졌습니다. 6
3.3. 문산호의 재발견과 미완의 인양
장사상륙작전은 한동안 '감춘 역사'로 남아 있었으며, 침몰한 문산호 또한 잊힌 존재였습니다. 7 그러나 47년의 세월이 흐른 1997년 3월 6일, 해병수색대원에 의해 장사리 앞바다에서 수중 모래펄에 묻혀 있던 문산호의 선체가 발견되었습니다. 6 발견 당시 보훈처의 지원을 받아 유해 인양 작업이 진행되었고, 이 과정에서 무릎뼈로 보이는 유골 한 점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12 문산호는 이후 2020년 전승기념관으로 탈바꿈하여 전쟁 당시의 역사를 알리는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11
IV. 잊힌 영웅들, 그리고 기념사업 논란의 전말
4.1. 전후 역사적 기록의 부재와 재평가
장사상륙작전 참전 용사들은 작전이 끝난 후 비로소 군번을 부여받는 등, 희생에 걸맞은 합당한 예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7 그들의 숭고한 희생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가려져 오랫동안 제대로 평가되지 못했습니다. 1 이후 생존자들이 모여 위령제를 지내고, 1991년 위령탑이 건립되며 점차 역사의 전면에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7
그러나 이 작전의 주요 수치들, 특히 희생자 규모는 출처마다 큰 차이를 보이며 모호한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정보의 오차가 아니라, 당시 작전의 기밀성과 학도병들에 대한 미흡한 행정 처리, 그리고 전후 오랜 기간의 역사적 외면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해석됩니다. 아래 표는 각 출처별로 제시된 수치들을 비교하여, 공식적인 기록이 얼마나 불명확했는지를 시각적으로 보여줍니다.
표 1: 장사상륙작전 주요 인원 및 피해 현황(추정)
구분 | 수치 및 출처 |
참전 인원 | 772명 4 / 720명 13 / 841명 9 |
학도병 인원 | 772명 4 / 718명 7 / 772명 (추정) 6 |
전사자 | 139명 1 / 120~130명 (추정) 6 |
부상자 | 92명 4 / 52명 1 |
수장/실종자 | 300여 명 수장 13 / 행방불명 다수 1 / 39명 행방불명 7 |
이처럼 수치들이 일관되지 않은 것은 당시 국가적 차원에서 해당 작전과 참전 용사들을 '공식적인' 역사로 충분히 기록하고 관리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불분명한 기록은 장사상륙작전이 오랜 시간 동안 잊힌 역사 또는 감춘 역사로 불리게 된 원인이자, 학도병들의 희생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비극적인 현실을 단적으로 드러냅니다.
4.2. 문산호 복원 및 전승기념관 건립 사업 관련 재정 및 행정적 논란
장사상륙작전의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고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문산호의 실물 모형을 복원하여 전승기념관을 건립하는 사업이 추진되었습니다. 이 사업에는 총 294억 원(국비 140억, 도비 77억, 군비 77억)의 예산이 투입되었으며 14, 다른 출처에서는 324억 원 7 또는 340억 원 16으로도 언급되는 등, 사업 초기부터 예산 규모에 대한 혼선이 있었습니다.
더욱 큰 문제는 사업 진행 과정에서 발생한 행정적·기술적 부실입니다. 경상북도 감사 결과에 따르면, 영덕군은 동해안의 높은 파고에 대한 면밀한 검토 없이 해상에서 배를 건조하는 것으로 설계했으나,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14 결국 배를 부산조선소에서 제작하여 영덕으로 예인하는 방식으로 변경되면서 30억 원의 추가 비용이 발생했습니다. 14 또한, 설계 업체가 제안한 북쪽 파도에 대비한 추가 방파제 건설을 반영하지 않아 파도로 인해 선체 내부 뒷부분이 휘는 문제가 발생했으며, 이를 보강하기 위해 80억 원 이상이 소요될 것으로 추정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14
표 2: 장사상륙작전 기념사업 예산 집행 및 논란 비용 분석
구분 | 비용 및 원인 |
총 사업비 (초기) | 294억원 (국비 140억, 도비 77억, 군비 77억) 14 |
총 사업비 (추정) | 324억원 7 / 340억원 16 |
추가 발생 비용 | 30억원 (부산에서 영덕으로 예인 및 장비 임차비) 14 |
향후 예상 소요 비용 | 80억원 이상 (추가 방파제 건설) 14 |
본 사업은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계획 수립 과정에 기술직이 아닌 행정직 공무원이 임명되는 등 행정적 부실을 드러냈습니다. 14 역사 속 문산호가 태풍에 좌초되었던 것처럼, 문산호 복원 사업 또한 '파도'에 대한 대비 부족으로 선체가 뒤틀리는 또 다른 종류의 실패를 경험했다는 점에서 비극적인 역사의 재현이라는 교훈을 남겼습니다. 이는 역사적 사건을 기리는 공공사업이 단순한 건설을 넘어, 그 사건의 맥락과 상징성을 깊이 이해하고 추진되어야 함을 시사합니다.
V. 종합 분석 및 정책 제언
5.1. 장사상륙작전의 희생과 교훈에 대한 다층적 분석
장사상륙작전은 한국전쟁의 전세를 뒤집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으나, 그 성공의 이면에는 어린 학도병들의 막대한 희생이 존재했습니다. 이는 군사적 성공이 특정 집단의 희생을 전제로 할 때 발생하는 윤리적 딜레마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오랫동안 잊혔던 장사상륙작전이 영화와 전승기념관을 통해 재조명된 것은 국민적 기억과 공감대가 역사적 진실을 발굴하고 숭고한 희생의 의미를 되새기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줍니다. 7
5.2. 기념사업의 성공적 완수를 위한 향후 과제
문산호 복원 및 기념관 건립 사업에서 드러난 행정적, 재정적 논란은 공공사업 추진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첫째, 유사 공공사업 추진 시 고도의 기술 전문성이 요구되는 분야에는 반드시 해당 전문가를 감독관으로 임명하고, 설계 단계부터 시공성, 경제성, 유지관리를 철저히 검토하여 예산 낭비를 방지해야 합니다. 둘째, 불명확한 희생자 명단 및 수치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와 발굴을 통해 역사적 진실에 다가가려는 노력을 지속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기념관은 단순한 전시 공간을 넘어, 비극적인 역사를 통해 미래 세대가 호국정신을 함양할 수 있는 '살아있는 교육장'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내실 있는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확충해 나가야 합니다. 10
5.3. 결론
장사상륙작전은 단순히 기록된 전투의 한 페이지가 아니라, 국가의 존재를 위해 치러진 희생과 그 희생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우리는 장사상륙작전의 비극이 단순한 과거의 이야기가 아닌, 현재의 문제를 직시하고 미래를 향한 교훈을 얻는 중요한 거울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잊힌 역사를 기억하고, 그 희생을 진정으로 기리는 길은 그들의 고통이 반복되지 않도록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데 있음을 재확인하는 바입니다.
* 시간은 흐르고 역사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우리의 기억은 희미해져 갑니다.
772명의 학도병중 생존자분의 증언 중에서 가슴에 맺히는 말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바라는 게 없습니다. 국가가 우리의 존재를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명예회복 말고는 다른것도 바라지 않으신 참전용사분들께 진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참고 자료
1. [국군의 날 특집] 평균나이 17세, 군번없이 포화속으로 뛰어든 숨은 영웅들 : 장사상륙작전, , https://www.youtube.com/watch?v=l0HDaqLHhT0
2. 인천 상륙 작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https://ko.wikipedia.org/wiki/%EC%9D%B8%EC%B2%9C_%EC%83%81%EB%A5%99_%EC%9E%91%EC%A0%84
3. 장사상륙작전<동족상잔의 비극, 6·25전쟁<지역N문화 테마, , https://ncms.nculture.org/korean-war/story/4296
4. [김태형의 시시각각] <66> 작전명령 제 174호, 장사상륙작전 - 매일신문, https://www.imaeil.com/page/view/2021091218373447207
5. 참전영웅들의 희생을 기리다… 장사상륙작전 75주년 기념식 - 경북도민일보, https://www.h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592648
6. 장사 상륙 작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https://ko.wikipedia.org/wiki/%EC%9E%A5%EC%82%AC_%EC%83%81%EB%A5%99_%EC%9E%91%EC%A0%84
7. 인천상륙작전 감춰진 비극···학도병 718명은 '버리는 돌'이었다 - 중앙일보, ,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972353
8. '작전명령 174호, 장사상륙작전'…돌아오지 못한 소년들 - 뉴시스, https://mobile.newsis.com/view/NISX20220624_0001919252
9. 9월의 6·25전쟁영웅 상륙함 '문산호'… 장사 상륙작전 참여 - 뉴스1, https://www.news1.kr/diplomacy/defense-diplomacy/4788581
10. '문산호' 61년만에 부활한다 - 문화일보, https://www.munhwa.com/article/10784643
11. UN평화기념관 방문을 환영합니다. 이달의 영웅 페이지 입니다., https://www.unpm.or.kr/un2022/sub.php?&MenuID=27&bCode=X11&cate=&st=&ss=&gotoPage=4&mode=view&bo_no=569
12. 한국전 좌초 문산함, 47년만에 유해 인양작업 - 조선일보,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1997/03/06/1997030670030.html
13. [포항]장사상륙작전 침몰 군함 발견, 문산호 인양작업 – 부산일보
https://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19970306000540
14. 영덕군 문산호 복원·전시 설계부실 등 엉터리 추진 -
https://www.idaegu.com/news/articleView.html?idxno=300206
15. 문산호 복원, 학도군 기념탑 설치 … '장사상륙작전 기념공원' 조성 착착 - 중앙일보https://www.joongang.co.kr/article/18041246
16. 잊혀진 전투 '장사상륙작전'…6.25 전세 역전 교두보 https://mobile.newsis.com/view/NISX20111222_0010064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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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ration Order No. 174: The Forgotten Heroes of the Jangsa Landing Operation
I. Introduction
This report reexamines the Jangsa Landing Operation, a strategic decoy mission carried out in September 1950 during the Korean War under Operation Order No. 174. Though pivotal in the success of the Incheon Landing Operation, this mission has long remained in the shadows of history. The report aims to highlight its strategic significance, the tragic sinking of the LST Munsan-ho, the sacrifices of young student soldiers, and the later controversy surrounding commemoration efforts.
II. Strategic Background of Operation No. 174
- Crisis at the Nakdong River Front:
In the summer of 1950, UN and South Korean forces were pushed back to the Nakdong River. General Douglas MacArthur's audacious Incheon Landing Operation (Operation Chromite) aimed to reverse the war's tide. - The Role of the Jangsa Landing Operation:
As a deception tactic (“Seongdong-gyeokseo”), the Jangsa Operation was intended to divert North Korean attention eastward, misleading them into believing that the main UN landing would occur on the east coast rather than Incheon. This succeeded in dispersing North Korean forces, contributing directly to the low-casualty success of Incheon.
III. The LST Munsan-ho: Tragedy at Sea
- Mission Deployment:
The LST Munsan-ho, originally the LST-120 from WWII, departed Busan on September 14, 1950, carrying 772 mostly teenage student soldiers (ages 14–17) of the 1st Independent Guerrilla Battalion. - Disaster on Arrival:
The ship was caught in Typhoon Kezia and stranded 150 meters from the shore of Jangsa, where it came under immediate fire from entrenched North Korean forces. Troops were forced to disembark under deadly conditions with minimal food and ammunition. - Fierce Resistance:
Despite having supplies for only 3 days, the battalion held the position for 8 days, disrupting enemy supply lines at great cost. Over 139 confirmed deaths, 92 wounded, and many more missing or drowned. The ship was abandoned afterward.
IV. Post-War Commemoration & Controversies
- Neglect and Rediscovery:
The Jangsa Operation was long forgotten. Survivors received military registration only after returning. In 1997, the remains of the Munsan-ho were rediscovered, with some bones recovered. - Memorial Project & Budget Controversies:
A replica ship and memorial park were funded with ₩29.4 billion (≈$25M USD), but the project faced criticism for design flaws, poor planning, and unexpected extra costs (e.g., ₩3B for sea towing, ₩8B+ for structural reinforcements).
V. Ethical & Policy Reflections
- Strategic Success, Ethical Dilemma:
While strategically successful, the operation raises ethical questions about sacrificing underage volunteers in deceptive missions. - Future Lessons:
Memorials must go beyond symbolism they must reflect historical truth, be technically sound, and honor sacrifices responsibly.
Conclusion
The Jangsa Landing was not merely a military maneuver but a profound moment of national sacrifice. Remembering the young student soldiers and their untold story is a moral obligation. We must ask: Do we honor their sacrifice with truth, or let bureaucratic failure bury it onc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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